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유럽 (문단 편집) === [[파일:루마니아 국기.svg|width=40]]{{{#e7dfa2 루마니아 왕국}}} === {{{#red '''플레이 불가'''}}} '''업뎃 예고[추후 검토]''' ##공장 35 인구 25120 * '''집권이념: 과도정부(전제주의, 왕립 루마니아군)''' * '''경제: 계획경제/경제권 무소속''' * {{{#!folding 국가 정신 * '''철관의 왕조''' ||루마니아의 국왕 미하이 1세는 몇 년 동안 사실상 계몽된 전제군주로 통치를 해 왔습니다. 당신이 이를 누구에게 묻는가에 따라, 이것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것입니다. 왕과 그 측근들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나라를 궁극적으로 민주화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왕의 적에게 이를 묻는다면, 그들은 그가 민주주의로의가능한 복구를 자기 자신에게만 사용하는 폭군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하이 자신만이 이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치력 획득: {{{#green '''+10%'''}}} * '''국왕 쿠데타의 유산''' ||아직 우리 국가에는 국왕의 통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철위대 잔당들의 규모는 결코 적지 않으며, 군대 역시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큰 골칫덩이가 될 것입니다. 루마니아는 그야말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 모든게 나아지길 바랄 뿐입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red '''-20%'''}}} 안정도: {{{#red '''-10.00%'''}}} * '''민족적 격변''' ||몇몇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루마니아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그리고 이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얻은 영토로 더 심화되었습니다. 트린스니스트리아의 우크라이나인,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세르비아인들과 독일인들까지, 이들은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안정도: {{{#red '''-15.00%'''}}} }}} * {{{#!folding 내각 * '''미하이 1세''' 지도자 {{{#!folding 인물설명 >루마니아의 군주 미하이 1세는 20년 이상 군림해왔지만 통치기간은 훨씬 짧습니다.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와 철위대에 의해 2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미하이는 꼭두각시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콘두커토르가 승리와 명성을 쌓을때 그는 어둠 속에 남겨져 있었습니ㅏㄷ. 안토네스쿠가 루마니아를 꽉 잡고 있는걸 눈으로 본 미하이는 독재자와 군대의 금빛 새장에서 빠져 나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안토네스쿠가 과도한 자만심에 불타 헝가리에게서 트란실바니아를 되찾기로 결정했을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 >전쟁은 승리했지만,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마주했고 점령지의 저항은 한계치에 도달했으며 팍트에서의 방출은 루마니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경제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했을때, 항상 조용하지만 관찰력이 있던 미하이는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국왕은 마침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한다는 목표로 노망난 안토네스쿠를 축출하고 그 지지자 중 많은 이들을 체포했고 콘두커토르의 유산을 없애기 위해 임시정부를 설립했습니다. > >왕의 카리스마와 매력은 많은 사람들을 금방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루마니아 사회는 수십년만에 억압적인 군국주의 정권에서 벗어나 자유화와 민주화의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대중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미하이에 대한 반발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군대에는 여전히 안토네스쿠의 영광스러웠떤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고 루마니아의 외단곳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과거의 유령이 여전히 숲을 배회합니다...}}} * '''두미트루 더머차누''' 정부수반 * '''콘스탄틴 비솔리아누''' 외무장관 * '''Ioan Mocsony-Stârcea''' 재무장관 * '''게오르게 미하일''' 내무장관}}} * {{{#!folding 주요 도시 * '''부쿠레슈티''' ||1860년대에, 약 10년 만에 부쿠레슈티는 크지만 눈에 띄지 않는 루마니아의 도시에서 현대적인 하수관, 전신선, 가로등, 공장들이 있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인근 유전의 발견으로 부쿠레슈티는 강력한 경제 강국으로 변모했고, 그 이후로 인구와 부 모두 끊임없이 팽창해 왔습니다. 이스탄불과 아테네에 이어 발칸반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부쿠레슈티의 인력과 자원은 루마니아의 이웃들이 널리 탐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루마니아에 힘을 더 실어줄지, 아니면 몰락을 불러올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 '''키시나우''' ||키시나우보다 더 주인이 자주 바뀐 도시가 어디있을까요? 불과 30 년 마네 백색 돌의 도시는 러시아의 멍에를 벗어나 독립해 루마니아에 점령되었다 러시아에게 다시 탈환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때 다시 한번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키시나우 사람들은 루마니아어를 주로 사용하며 부쿠레슈티 형제들과 같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지만, 키시나우와 몰도바 지역은 루마니아에 비해 민족적으로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입니다. 수천 명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불가리아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부분의 가가우즈인들도 이곳을 고향아라 부릅니다. 점점 더 분리되고 있는 유럽의 독특한 다문화 환경은 다른 루마니아의 도시들과 키시나우 사회를 구별시켰습니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표면적으로 독일에 의해 동맹국의 틀에서 억눌러져 왔던 헝가리와의 외교 관계가 다시 격화되었고, 서러시아 전쟁으로 독일이 발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졌을때 북부 [[트란실바니아]] 수복을 목적으로 슬로바키아와 함께 헝가리를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헝가리는 독일에게 중재를 요청하였고, 독일은 루마니아의 북부 트란실바니아와 슬로바키아의 남부 슬로바키아 영유권을 인정하게 된다. 그 여파로 인해 루마니아-독일 관계는 붕괴되었고 아인하이츠팍트에서 탈퇴하였으며, 루마니아는 이후 안토네스쿠의 과도한 확장으로 인한 내부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자 국왕 [[미하이 1세]]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다시 국왕 입헌 정권이 수립된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간의 외교 디시전([[그레이트 게임]])의 결과를 따라 차후 외교관계가 결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